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피사로 (문단 편집) === 명예로운 13인 === 당시 [[남아메리카]]는 그야말로 미지의 땅이었다. [[스페인]]의 영향력은 파나마 정도까지가 한계였다. 1524년에 이뤄진 최초의 남아메리카 원정은 정보 부족, 식량 부족, 적대적인 [[아메리카 원주민]] 등의 이유 때문에 대실패로 끝났다. 그래서 파나마 총독은 피사로의 원정을 반대했다. 애초에 파나마가 탄생한지 5년밖에 안 되어 단 1명의 일손도 모자라는 상황이었으니, 젊은이들을 데려가는 피사로의 원정이 환영받기는 영 어려웠다.1526년에 새로운 [[총독]]이 부임한 뒤에야 피사로는 제2차 원정을 위한 허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. 하지만 두 번째 원정 역시 초반에는 개고생 개뻘짓의 연속이었다. 급기야 사망자까지 발생하자, 열이 뻗친 신임 총독은 연락대를 보내 피사로의 귀환을 종용했다. 그러나 피사로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. 그는 땅에 선을 그은 뒤에, >'''"나와 함께 할 사람은 이 선 안에 남아라!"''' 고 선언했다. 선 안에 남은 사람은 13명이었다. 이들은 이후 '''Trece de la Fama'''(명예로운 13인)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. 귀환을 거부한 13인은 근처의 섬에서 ~~개거지꼴로~~ 7개월을 버텼다. 결국 파나마에서도 어쩔 수 없이 원정이 지속되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, 지원군이 도착했다. 마침내 1528년, 원정대는 오늘날의 [[페루]] 북서부 툼베스에서 우호적인 부족과 접촉했다. 이들은 피사로에게 재물을 제공했고 내륙의 [[잉카 제국|거대 제국]]에 대한 정보까지 주었다. 이때 훗날 통역으로 맹활약(?)하게 되는 원주민 2~3명까지 얻었다. 하지만, 그 사이 파나마 총독은 또 다른 인물로 바뀌었다. 신임 총독은 피사로의 남미 원정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고 결국 피사로는 파나마 총독보다 더 좋은 끗발을 찾아 근 20년 만에 [[스페인 왕국|고국]]으로 돌아가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